[한국농정신문 김수나 기자] 
우리나라 역대 최악의 산불로 기록된 경북·경남 산불은 농민들과 지역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농가주택은 기둥 하나 없이 폭삭 무너져내렸고, 농기계뿐만 아니라 저장고에 보관하던 사과, 비료 등은 하나도 남김없이 잿더미가 돼버렸다. 지난 3월 31일 경북 안동시 남선면 신흥리 마을이 역대 최악의 산불로 인해 초토화 돼 있다. 한승호 기자 농민들에게 2025년은 연속된 재난이 몰아닥친 해였다. 농사 기반은 물론 가족의 보금자리를 잃거나 인명 피해까지 봤다. 이른 봄부터 대형 산불이 영남지역을 엄습했고, 여름엔 폭우가 충청·전라·경남 등지를 휩쓸었다. 묘목부터 출하 직전 농작물, 호미부터 고가의 농기계까지 ‘무엇을 잃었는지도 다 알 수 없을 정도’로 폐허만 남았다.
가을이 되자 남도에선 유례없는 가을장마가 이어졌고, 북동쪽 끝 강릉에선 사상 최악의 가뭄 사태가 발생했다. 전국 곳곳에서 수확을 앞둔 작물들이 무르거나 병해에 시달렸고, 벼에는 깨씨무늬병이 확산하는 등 다중 재해가 농민의 삶을 타격했다.
농약대나 대파대뿐인 재해 복구비, 보장성이 떨어지고 사각지대가 많은 농작물재해보험, 특별재난지역에만 한시 지원하는 생계비 등은 ‘일상 회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농업재해 인정은 농민들의 거듭된 요구 끝에 뒤늦게 처리되기 일쑤였다. 십시일반 한 국민 성금은 지원기준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산불 대처와 배수 관리, 수원 확보 등 재난대응 체계와 후속 방안은 대개 무용지물이었다.
농민들은 복구를 위해 또다시 빚을 내야만 하는 처지에 내몰렸지만, 기존 농가부채가 상당하고 재해로 담보물마저 잃어 그조차 어려웠다. 일상 회복으로 가는 길에 국가의 역할은 너무나 부족했고, 결국 농민들은 일상 회복에 필요한 대부분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농민들은 수확의 보람을 다시 느낄 날을 고대하며 재난의 시기를 버티고 있다.
평생 터전 앗아간 영남 산불
지난 3월 말 경북 의성에서 시작돼 순식간에 경남북 일대를 덮친 초대형 산불로 농민들은 ‘호미 한 자루’ 남김없이 모든 농사 기반을 잃었다. 피해 지역 농민들은 강풍과 함께 날아든 불덩이 속에서 몸만 겨우 빠져나와야 했고, 하루아침에 그야말로 맨몸만 남은 상황에 놓였다.
정부도 대규모 산불임을 고려해 농작물 대파대와 농업시설 등 제한적이나마 지원율을 상향했지만, 막대한 현장 피해에 견줘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농민들에게 농사 재개와 생활 등에 필요한 자금을 구하는 방법은 융자밖엔 없었지만, 그마저도 막혔다. 농민 대부분이 빚을 내 농사 기반을 일궜기에 매년 갚아야 할 빚이 있었고 주거지와 생산기반을 모두 잃어 더는 담보 여력이 없어서였다.
더구나 수확물이 다시 나오기 전까지 피해 농민들은 소득이 전혀 없어 장기 채무유예와 지속적인 생활비 지원이 시급했지만, 이 같은 최소 안전장치는 없었다. 재난의 고통은 단지 가진 걸 잃은 데에만 그치지 않았고, 다시 일어설 선택지가 거의 없는 막막함으로 이어졌다. 특히 재해 지원 과정에서 세입자·임차농·무허가 시설·재해보험 미가입 농가 등 사각지대가 여실히 드러났다.
물폭탄과 최악 가뭄, ‘농사 포기’ 기로에 서다
지난 7월 전국 곳곳을 덮친 수해는 순식간에 1년 농사의 결실을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올해 수해는 농작물 침수에만 그치지 않았고, 제방 붕괴와 범람이 겹쳐 시설하우스와 가축 유실, 인명 피해까지 속출한 참사로 이어졌다. 살아남은 주민들도 파도처럼 덮쳐오는 강물에 몸만 겨우 피신할 지경이었다. 충남 서산·예산, 경남 산청 등에 대규모 피해가 집중됐고, 피해 지역 주민 대부분이 부실 제방·부적절한 댐 수문 개방·대피 경보 미흡 등 인재로 볼 요인이 분명히 있다며 분노했다. 최근 기록적 폭우가 반복되고 있지만, 이에 따른 하천·배수 관리, 안전 대응 및 재난 보상 체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이와 달리 강원 강릉시에선 물이 없어 농민들이 ‘농사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8월 30일 주 수원지인 오봉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강릉지역에 재난사태가 선포됐고 그 직후 농업용수 공급이 아예 멈추자, 강릉 농민들이 오랜 속앓이 끝에 자식 같은 농작물을 포기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강릉 농민들은 강릉시가 속초시 등 인근 지역과 달리 상수원을 추가로 확보하지 않고 농업용 저수지인 오봉저수지에만 의존했다며 조속한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지난 10월 27일 전북 김제시 부량면 들녘에서 열린 ‘논콩 피해 추가조사 실시! 특별재난지역 선포! 김제농민 논콩 갈아엎기 투쟁’에서 4대의 트랙터가 올가을 이상기후로 수확이 불가능할 정도로 병이 발생한 논콩을 갈아엎고 있다. 한승호 기자 수확 목전의 가을장마, 이어진 병충해 창궐
국가의 미비한 재해 대응 속에서 9월의 하늘마저 농심을 저버렸다. 9월 초 전북·충남을 중심으로 폭우가 내려 알곡이 무르익던 벼와 침수에 취약한 논콩이 7월에 이어 또 침수됐다. 게다가 9월 내내 맑은 하늘을 보기 힘들 만큼 비가 계속됐다. 2025년 9월 강우일수는 15.1일(평년 9.3일), 평균기온은 평년보다 2.5℃ 높은 23℃로 각각 역대 2위를 기록했다(기상청 발표). 이 같은 고온다습한 날씨로 10월 들어선 각지에서 벼 깨씨무늬병과 무름병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아울러 수확기를 맞은 조·중생종 사과에는 낙과·열과 피해가 속출했고, 부사는 착색이 잘 안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급기야 전국 최대 논콩 생산지역인 전북 김제에선 농민들이 습해로 까맣게 썩은 논콩을 갈아엎으며 ‘논콩 추가 피해조사’를 촉구하기도 했다.
일 년 내내 맨몸으로 재해를 버텨온 농민들은 지역과 재해 종류를 떠나 △재해 복구비 현실화 △신속한 조사 및 농업재해 인정 △품목 특성에 맞는 조사방식 마련 △농작물재해보험·재해복구 정책의 사각지대 해소 △피해조사·대책 논의에 농민 참여 보장을 거듭 촉구했다. 특히 산불피해 주민들은 △지원 내용 투명한 공개 △관련 법 제정·지원안 마련 논의에 주민 참여를 보장하라는 목소리를 냈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http://www.ikpnews.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