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서울 용산구 대통령실 앞에서 열린 ‘한·미 상호관세 협상 농축산물 개방 반대’ 결의대회에서 주요 농민단체장들이 상복을 입고 정부의 농축산물 개방 방침에 항의하고 있다.미국과 막바지 관세협상을 조율 중인 한국 정부가 협상카드로 농축산물시장 추가 개방을 공식화하면서 농업계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앞서 미국과 협상을 체결한 일본이 쌀시장을 개방한 데 이어 호주도 20여년 만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빗장을 해제하면서 한국 농축산물을 향한 개방 압박이 한층 거세졌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대통령실은 25일 ‘통상대책회의’를 열고 현재 미국과 진행 중인 협상 추이를 점검했다.
이날 회의에는 김용범 정책실장, 위성락 안보실장,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회의 직후 진행된 브리핑에서 김 실장은 “쌀과 쇠고기 등 농축산물이 협상 품목에서 제외됐다는 보도가 있었다”는 질의에 대해 “협상 품목 안에 농산물이 포함돼 있다”고 답해 사실상 시장 개방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인정했다.
당초 정부는 미국과 협상 테이블에 쌀·쇠고기 등 민감 품목을 올리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미·일간 협상에 따라 분위기는 급변한 것으로 파악됐다.
일본은 22일(미국 시각) 쌀시장 개방과 대규모 투자 등을 조건으로 미국이 부과한 상호관세(25%)와 자동차 관세(25%)를 일괄 15%로 낮췄다. 협상에서 일본은 미국산 쌀 수입량을 75% 늘리고, 옥수수·대두·비료·바이오에탄올 등 미국산 농산물을 80억달러(약 11조원) 규모로 구매하기로 했다. 일본은 매년 77만t(현미 기준)의 쌀을 저율관세할당(TRQ) 방식으로 무관세로 수입한다. 국가별 수입 쿼터는 운용하지 않는다. 지난해 미국산 쌀 수입량은 34만6000t으로, 미국과의 합의를 따를 경우 앞으로 수입량은 약 60만t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날 결의대회에서 최흥식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장이 ‘한·미 관세협상 농축산물 개방 반대’ 팻말을 들고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다. 이종수 기자여기에 지난 4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은 (쌀에 대한 관세를) 50%에서 무려 513%까지 다르게 부과한다”고 불만을 토로한 것도 정부가 쌀시장 개방을 검토한 배경으로 꼽힌다.
호주가 24일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수입 규제 조치를 해제하며 상호관세(20%)를 낮출 카드로 사용했다는 분석도 정부의 입장 변화에 영향을 끼쳤다. 호주는 2003년 미국산 쇠고기에서 소해면상뇌증(BSE·광우병)이 발생한 이후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호주의 시장 개방을 두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쇠고기를 거부하는 다른 나라들에도 통보했다”고 밝힌 것도 한국 정부에 압박감을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현재 한국은 BSE를 이유로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호주와 한국의 상황은 다른 만큼 농산물 추가 개방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분석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쌀 의무수입의 경우 일본과 달리 한국은 미국·중국·베트남·태국·호주 등 5개국과 조약을 체결하고 국가별 쿼터를 운용하고 있다.
미국산 쌀에 대한 쿼터를 재조정하려면 조약 체결국 모두의 동의가 필요한데, 나머지 국가들도 자국 쿼터 확대를 요구할 경우 전체 수입 쿼터가 늘어날 위험이 있다. 더욱이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대선 기간 발표한 공약집에서 쌀값 안정을 위해 ‘쌀 수급안정을 위한 쌀 의무수입물량(TRQ) 감축 추진’을 제시한 만큼 TRQ 수입 확대는 공약 파기 논란과 농업계의 전면적인 반발을 불러올 공산이 크다.
30개월령 이상 쇠고기 수입 허용 문제 역시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따라 국회 심의를 거쳐야 해 미국과 협상 때 시장 개방에 합의하더라도 국내 반발이 커질 경우 심의 단계에서 무산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서진교 GSnJ 인스티튜트 원장은 “일본은 전체 쌀 수입 쿼터를 늘리지 않았고, 구매를 약정한 미국산 농산물도 자국 생산 품목이 아니기 때문에 농업에서 크게 양보했다고 볼 수 없다”며 “한국도 다양한 협상 시나리오를 갖고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