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순창군 쌍치면 주민 정옥윤씨가 면 내 유일한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 있다. 정씨는 “농협주유소라는 이유로 이곳에서 지역화폐도 기본소득도 쓸 수 없다는 게 답답하다”고 말했다.“돈만 주면 뭐합니까? 사실상 쓸 수 없게 만들어 물가만 오르고 다 날릴 판입니다.”
지난해 ‘농어촌기본소득(이하 기본소득)’ 시범사업 대상으로 선정된 10개 군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하지만 3개월 만에 주민들의 기대는 차갑게 식어버렸다. 상권이 부족한 면 단위로 기본소득 사용처를 묶어버린 데다 지역농협이 운영하는 주유소와 영농자재판매장 등 경제사업장도 사용처에서 제외돼서다. 주민들은 “돈을 받아도 쓸 데가 없게 만들었다”면서 “농촌 현실을 모르는 탁상공론의 전형”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면’에 갇힌 기본소득…역차별 논란=농림축산식품부는 기본소득 사용처를 ‘지급 대상자가 거주하는 읍 또는 면’으로 국한하는 원칙을 내세웠다. 다만 사용처가 부족한 경우 여러개 면을, 또는 읍을 제외한 전체 면을 묶어 생활권을 지정한 후 해당 생활권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전북 순창군은 기본소득 사용처를 읍 권역, 북서부 권역(2개면), 면 권역(8개면) 3개로 나눴다. 읍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군 전체에서, 북서부·면 권역 주민들은 해당 권역 내에서만 기본소득을 쓸 수 있다. 대신 면 권역은 5만원까지 읍에서 기본소득을 사용할 수 있고, 병원·약국·학원·안경점·영화관은 군 전체 사용 가능업종으로 별도 지정했다.
이런 내용이 공개되자 면 단위 주민들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권장원씨(60·순창군 인계면)는 “우리 지역엔 식당 한곳과 주말엔 문닫는 소규모 하나로마트 하나뿐”이라면서 “현실이 이런데 읍에선 5만원밖에 못 쓰고 면에서만 사용하라고 하니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좋은 취지는 사라지고 주민들이 ‘면’에 갇힌 꼴”이라고 지적했다.
다른 지역도 사정은 비슷하다. 경기 연천군은 10개 읍·면을 6개 권역으로 나눴는데, 면지역 주민은 읍지역에서 기본소득을 사용할 수 없다.
한기원씨(75·연천군 장남면)는 “기본소득 사용처가 면 내 소형마트나 음식점으로 제한되면 정작 이용할 곳이 없다”며 “특히 읍으로 나가는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은 노인들은 큰 불편을 겪을 것”이라고 말했다.
충북 옥천군 청성면에서 벼·복숭아 농사를 짓는 전형열씨(57)는 “보통 시골 사람들은 장날에 맞춰 읍내에 나가 한꺼번에 장을 보는 경우가 많은데, 어디는 되고 어디는 안되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며 “군 전역으로 기본소득 사용처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가인상 등 각종 부작용 우려=농식품부는 기본소득이 지역 내 소비를 일으켜 경제가 선순화되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만, 주민들은 오히려 물가인상 같은 부작용이 벌어질 수 있다고 걱정한다.
주유소가 대표적이다. 대중교통이 불편한 농촌은 지역 특성상 자차 이용률이 높고, 도시가스가 공급되지 않는 지역이 많아 생활비에서 기름값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편이다. 특히 기본소득 사용처가 적은 면지역에선 주유소가 인기 사용처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면 단위일수록 농협 외에는 주유소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농협주유소에서는 기본소득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정옥윤씨(62·순창군 쌍치면)는 “보통 한달에 주유비로 50만원 정도 쓰고, 겨울철엔 난방비로 60만원 이상 들기 때문에 주유소에서 기본소득을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기본소득 사용처 권역인 쌍치·복흥면에서 농협을 빼고 나면 주유소가 한곳뿐이라 기름값이 비싸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한국석유공사의 유가정보서비스 오피넷에 따르면 13일 기준 복흥면 내 민간 주유소 휘발유값은 순창농협 쌍치지점보다 1ℓ당 46원 높다.
이는 순창군 전체가 비슷한 상황이다. 군 전체 주유소 18곳의 휘발유값을 최저가순으로 정렬하면 상위 1∼7위까지 모두 농협주유소다(13일 기준). 농협주유소는 가장 저렴한 곳이 1ℓ당 1740원, 가장 비싸도 1760원인 반면 그 외 주유소는 가장 저렴한 알뜰주유소가 1759원이고, 1795원인 곳도 3곳이나 있다.
한 농협 관계자는 “예전에는 다른 주유소들이 고객을 유치하려고 농협보다 가격을 저렴하게 했고, 농협 가격이 인하되면 따라서 낮추는 등 농협이 물가인상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왔다”면서 “하지만 10% 할인 효과가 있는 지역화폐를 농협에서만 쓸 수 없게 되면서 우리가 가격을 낮춰도 다른 주유소의 기름값이 내려가지 않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기본소득을 정해진 기한 안에 사용하지 못해 소멸되거나 기본소득 카드를 낮은 가격에 사들이는 ‘기본소득 깡’이 출현할 것이라는 우려마저 나온다.
순창=윤슬기, 연천=오현식, 옥천=박준하 기자 sgyoon@nongmin.com
[용어설명] 농어촌기본소득
인구감소지역 10개 군 주민에게 소득·재산 상관없이 1인당 월 15만원(일부 지역 20만원)을 지역사랑상품권으로 지급하는 것. 이재명정부의 핵심 국정과제로 2026∼2027년 2년간 시범 시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