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의 특산품으로 꼽히는 황금향이 약 500㎞ 북상한 충청도와 경기도에서 재배되고 있다. 경상북도가 주산지인 사과가 강원도 양구군에서 재배되고 있고 전라남도의 특산품인 배도 경기 지역에서 재배가 시작됐다. 반면 제주도에서는 열대과일인 바나나와 망고, 용과, 레몬 등이 재배되고 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건 재배기술이 발전한 것도 있지만 지구온난화로 평균 기온이 상승하는 등의 재배 환경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 중심부로 북상하는 농작물=충남 태안군 황금향 재배 시초지인 ‘아람농원’은 약 999평(3천300㎡) 규모 비닐하우스 안에서 최저 5도, 최고 30도 기온을 유지하며 12년째 황금향을 생산하고 있다.
2012년 3월, 4년생 황금향 묘목 350주를 하우스에 식재해 태안에선 최초로 황금향 재배에 성공한 농부 임대근(58)씨는 25년간 장미(시설)를 재배해오다 수출시장 여건 악화와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새 소득원으로 황금향을 선택했다.
농가에서 만난 임씨는 "기존 장미 재배 하우스에서 황금향 월동 재배가 가능해 큰 비용이 들지 않을 것 같아서 (황금향을) 대체작목으로 선정했다"며 "기후와 해풍, 토질이 좋은 태안에서 생산된 황금향은 당도가 높고 과일 향이 좋다. 즙액도 많고 육질이 부드러워서 맛이 훌륭하다"고 자랑했다.
제주도에서만 재배가 이뤄졌던 황금향은 수년 새 기후변화로 인해 제주도만큼 따뜻해진 태안에서도 자랄 수 있게 된 셈이다.
태안 황금향은 시설 화훼농가들이 대체작목으로 재배를 시작해 2012년부터 재배단지도 조성됐다. 기존 하우스를 활용하면 휴지기인 겨울철에 난방을 별도로 하지 않아도 영상 5도 정도를 유지하며 겨울을 날 수 있어 태안 농부들의 새 소득작목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태안에는 아람농원을 비롯해 황금향 작목반에 5개 농가가 가입돼 있다. 1.18㏊(헥타르) 규모 비닐하우스에선 매년 황금향 40t이 생산된다. 태안 황금향의 성공적인 재배 소식을 듣고 매년 10여 곳 이상의 농업인단체와 농부 등이 태안을 방문해 벤치마킹하고 있다.
황금향과 같은 만감류(한라봉·천혜향 등)는 태안보다 더 위쪽인 서울·경기 등 수도권까지 진출했다. 광주시는 2018년부터 시범사업을 통해 감귤 재배 및 체험 농가를 육성하고 있다.
제주 특산품 황금향, 12년째 태안서 생산
경기 광주는 2018년부터 감귤농가 육성
제주도에선 망고·용과·레몬 등 생산 늘어
사과가 주산지인 경북은 아열대 기후로 바뀌면서 전체 생산량이 줄었다. 반면 200㎞ 북상한 경기·강원 등 비교적 서늘한 지역에선 오히려 생산량과 재배 면적이 늘고 있다. 사과는 연평균 기온 8~11도, 생육기 평균기온 15~18도로 선선한 기온에서 잘 자란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간한 보고서 ‘농업전망 2024’의 ‘과일 수급 동향과 전망’을 보면 2010년대 평균 49만2천t이었던 사과 전체 생산량은 2020년대부터 이상 기후에 따른 생육기 작황 부진으로 48만t으로 감소했다.
지난해에는 사과 전체 생산량이 전년 대비 30% 감소한 39만4천t이었다. 재배 면적은 전년 대비 2% 감소한 3만3천789㏊(헥타르)다.
사과 신규 산지인 경기·강원의 지난해 재배 면적은 2천174㏊(헥타르)로 면적 비중은 6%에 불과했으나 온난화에 따른 재배지 북상과 각 지방자치단체 재배 확대 지원사업 등으로 2000년에 비해 재배 면적이 194% 증가했다. 이 기간 영남은 13% 늘었고 충청은 14% 감소했다.
전남이 주산지인 배도 상황은 비슷하다. 전남의 배 재배 면적은 2020년 1천734㏊(헥타르)로 2010년(3천297㏊)보다 약 47% 감소했다. 반면 안성은 오히려 20%가량 더 늘었다.
경기도는 현재 농가에서 새로운 작물을 재배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올해 214억원을 투입해 사과와 배, 복숭아, 포도 등 14개 품목 재배를 지원할 방침이다.
◇50여 년 뒤 사과·배 강원서만 생산=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이 기후변화에 따른 ‘6대 과일 재배지 변동’을 예측한 가상 시나리오를 보면 50여 년 뒤인 2070년대에는 사과나 배, 포도, 단감, 감귤, 복숭아 등 주요 과일의 재배 지역이 지금과는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농진청이 과일 재배 적지와 재배 가능지를 2090년까지 10년 단위로 예측한 결과, 사과는 지속 감소했고 배와 복숭아, 포도는 2050년 정도까지 소폭 상승한 뒤 감소했다. 단감과 감귤은 계속 증가할 것으로 나타났다.
사과는 30년 뒤 기후 조건과 비교해봤을 때 2070년대쯤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될 것으로 예상했다. 배와 복숭아는 2090년대쯤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재배된다고 전망했다.
특히 품질 좋은 사과와 배는 2090년에는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2090년대에는 복숭아도 전 국토의 5.2%만 기후적으로 재배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2081년 국내 연평균기온 7도 상승 전망
10년 간 배 생산, 전남 47%↓·안성 20%↑
사과 2070년대부터 강원도 일부에서만 재배
농진청은 2081년~2100년 사이 전 세계와 우리나라 연평균 기온이 각각 6.9도, 7.0도 상승할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과거 30년간(1981~2010년)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계산한 ‘고탄소 시나리오(SSP5)’를 보면 국토의 6.3%를 차지하는 아열대 기후(월평균 기온 10도 이상이 연간 8개월 이상 지속)는 2030년엔 18.2%, 2050년엔 55.9%, 2090년엔 97.4%로 확대할 것으로 예상했다.
농진청은 기후변화에 따른 작물 생산성과 품질 저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후 적응형 품종’을 육성하고 권역별로 적절한 작목을 배치하고 있다.
아울러 기후변화로 새롭게 재배 가능한 작물을 개발하기 위해 열대·아열대 작물 총 52종을 도입해 적응성을 시험한 뒤 국내 환경에 맞는 20종을 선발했다.
이 중 백향과(패션프루트), 망고, 용과 등 과일 8종과 여주, 롱빈, 아티초크 등 채소 7종 등 총 15개 작목의 재배 기술을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브라질 남부가 주산지인 백향과나 인도·동남아에서만 나던 망고, 지중해 국가 작물인 올리브 등은 남부지방에서부터 생산이 시작돼 수도권까지 확장한 상태다.
2017년 1곳에 불과했던 올리브 재배 농가는 지난해 기준 제주도에만 15곳으로 늘었다. 망고는 경남 통영과 전남 영광에서도 생산하는 과일이 됐다.
농진청, 국내 재배 아열대 작물 20종 선발
용과·롱빈 등 과일 8·채소 7종 기술 보급
기온 1도 오를수록 농산물값 0.5% 상승
금사과·금배 고착화… 맞춤작물 재배해야
충남에선 바나나와 파파야가 생산된다. 안면도에서 ‘오행팜연수원’을 운영 중인 이용권 대표는 "바나나와 파파야를 비롯해 커피, 올리브, 구아바, 한라봉 등 다양한 열대과일을 키우고 있다"며 "1년 내내 수요가 있고 인기가 좋다"고 했다.
백향과, 애플망고 같은 아열대 과일은 화성·안성·평택 등 경기지역 농가에서도 대체작목으로 키우고 있다. 대표적인 동남아 채소인 공심채(모닝글로리)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화성·평택·안산·김포 등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다.
농진청은 아열대 작물을 키우는 농가가 늘자 지난 2월 지난달 처음으로 ‘아열대 과일 적정 재배지’를 볼 수 있는 지도를 배포했다.
경기도농업기술원도 올해 초부터 다음 달까지 아열대 과일·채소 작목 재배 농가 50여 곳을 상대로 재배 현황 등 실태조사를 진행 중이다. 도농기원 관계자는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경기지역에서도 아열대 농작물을 생산할 수 있게 돼 대체작물로 선택한다"며 "생산을 좀 더 확대해보고자 실태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기온 1도 오를수록 물가 상승…"부담"=한국은행은 지난 7월 발간한 ‘기후변화가 국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통해 "기온이 1도 오를수록 농산물 가격 상승률이 0.4~0.5%p 높아지고, 이 영향은 6개월 정도 지속된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또 1년간 매달 평균기온이 장기평균(1973~2023년)보다 1도 상승하는 경우를 가정한 결과, 1년 후 농산물 가격은 2%, 전체 소비자물가는 0.7% 수준으로 오를 것으로 예상했다.
국내 평균기온이 2019~2023년 13.2도에서 2040년 13.6~13.8도까지 오른다고 가정한다면 농산물 가격은 현재보다 0.6~1.1%, 전체 소비자물가는 0.3~0.6% 더 높아지는 것이다.
사과나 배처럼 자주 먹는 과일들의 재배 면적이 향후 10년 동안 큰 폭으로 줄어들 거란 전망도 소비자들에겐 부담으로 다가온다. 재배 면적과 생산량이 줄면 이른바 ‘금사과’, ‘금배’로 불리는 높은 가격이 고착화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 농산물유통정보에 따르면 사과 도매가격은 올해 초 10㎏당 9만740원을 기록해 사상 첫 9만 원대를 돌파했다. 이는 지난해 가격인 4만1천40원보다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농진청 관계자는 "온난화로 고품질 과일, 채소 등을 생산할 수 있는 재배 적지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에 맞는 품종과 재배법을 보급하고, 재배지 증가 작물의 경우 수출, 가공품 등을 개발하려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