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배정된 후계농업경영인 육성자금 8000억 원이 지난 8월 조기 소진되면서 대출길이 막힌 청년창업농과 후계농업경영인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오랫동안 준비한 영농계획에 차질을 빚는 것은 물론 육성자금만 믿고 농지를 계약했다 계약금을 날리거나, 시설공사 잔금을 치르지 못해 업체로부터 소송 압박을 받는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민원이 빗발치자 정부는 부랴부랴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총 1000억원의 자금을 추가 배정했지만 8월20일 이전 계약에 한정돼 있어 현장의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더 큰 문제는 내년이다. 국회에 제출된 2025년도 정부 예산안에 따르면 관련 예산은 올해보다 2000억 원이 적은 6000억 원으로 축소 편성됐다. 올해 이월되는 대출 수요와 내년에 또 선발되는 신규 인원을 감안하면 자금부족 사태는 앞으로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 8월 배정자금 조기 소진…대출 길 막힌 후계농들, 곳곳서 비명
2023년 후계농에 선정돼 딸기농사를 준비 중인 군산의 M씨는 지난 5월부터 스마트팜 시설 연동하우스 설치공사를 시작, 10월에 완공했으나 자금 소진을 이유로 대출 승인을 받지 못해 심각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M씨는 “완공이 된 상황이라 업체들의 자금 독촉이 계속되고 있지만 대금 정산을 치르지 못하고 있다. 몇몇 인부들은 계약불이행(잔금 미처리)으로 법정소송도 불사하겠다고 하는데, 여기저기 문의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고만 하니 너무 막막하다. 내년 1월 예산이 확보돼 신청하면 우선적으로 배정하겠다는 말만 믿고 기다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어렵다”고 호소했다.
올해 우수청년후계농으로 선정된 무안의 청년농업인 A씨는 하우스 5동 신축을 위해 지난 4월 대출(9000만원) 서류를 제출해 6월 승인을 받았고, 8월 10일 업체와 계약서를 작성한 후 작업을 진행하다 날벼락을 맞았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데, 농협으로부터 자금이 부족해 대출이 어렵다는 통보가 날라온 것. 농식품부를 비롯 군과 농협에 수차례 항의 전화를 돌렸지만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다행히 며칠 전 추가 자금 지원이 이뤄져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지난 몇 개월을 생각하면 아찔한 심정이다. 그는 “하우스 완성 시기에 맞춰 준비해 둔 양파 모에 대한 걱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인부들 임금과 자재비용 등을 처리해야 하는데 나를 믿고 하우스 작업을 진행해준 업체에 피해를 줄 것 같아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는 “정부가 직접 선발해서 준비한 서류까지 다 통과시켜놓고, 공사 진행 중에 갑자기 자금이 없어 지원을 못하겠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럴거면 아예 대상자로 선발하지 말았어야 한다. 꿈을 갖고 농업에 도전하라 해놓고,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할 수 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올해 후계농업경영인으로 선정된 L씨는 오랫동안 준비한 영농 계획이 미뤄진 케이스다. 3년 전부터 유럽 상추에 관한 공부를 시작, 수경재배 계획을 세우고 평창으로 이주를 마쳤지만 올해 대출금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8월에 예산이 조기 소진될 수 있으니 빨리 지원하라는 문자를 받고 서둘러 움직였는데, 결국 대출 신청조차 하지 못했다”며 “후계농으로 선정되기까지 오랜기간 공부하며 꼼꼼히 준비했는데 허탈하다. 시설 설치기간과 농작물 작기를 생각하면 2년이라는 시간이 늦춰진건데, 평창에 다른 기반이 마련돼 있는 것도 아니라 골치가 아픈 상황”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청년농 늘리기 급급, 예견된 사태…내년 예산은 더 줄어 문제 심각
사실 이같은 사태는 청년후계농 선발 인원이 크게 늘면서 어느 정도 예견돼 왔던 사태다.
2022년 윤석열 정부는 국정과제인 ‘농업의 미래성장산업화’를 달성하기 위해 청년농을 2027년까지 3만명으로 늘리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위해 2018년 1600명으로 시작한 청년농 영농정착지원사업 선정규모는 2023년 4000명으로 늘어났다. 선발 인원은 올해와 내년 각 5000명에 이어 2026~2027년 각 6000명으로 더 늘어날 예정이다. 그래야 2027년 3만명 목표를 채울 수 있다.
2023년부터 개선된 후계농육성자금 지원조건도 수요 증가에 한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자금 지원 한도를 최대 3억원에서 5억원으로 높이고, 금리는 2%에서 1.5%로 0.5%포인트 인하했다. 상환기간은 5년거치 10년 상환에서 20년 상환으로 2배 연장했다. 농지와 원자재 가격이 계속 상승하고 있어 영농초기 투자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는 점과 영농 여건이 안정되기 전에 대출금 상환 압박이 지나치다는 현장의 애로 사항을 반영한 조치였다.
물론 관련 예산도 늘었다. 2022년 3750억원에서 2023년 8000억원으로 증액됐고, 올해도 8000억원의 예산이 배정됐지만 늘어난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이와 관련 농업인력 전문가인 A박사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의대 정원 사태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지적한 뒤 “3만명 공약이 나올 때부터 무슨 근거로 나온 숫자냐, 가능한 숫자냐, 말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아무 준비 없이 대통령 공약에 맞춰 선발 인원만 크게 늘려놓았으니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자금도 자금이지만 현장에선 농지 확보 문제도 심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후계농업육성자금 예산은 이차보전예산으로 실제 정부 재정 부담은 700억 정도에 불과하다. 어쨌든 선발된 인원에 대해선 차질 없이 자금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국회 심의 과정에서 내년 예산은 반드시 추가로 확보하되, 앞으로 신규 선발할 인원에 대해선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농식품부 청년농육성정책팀 관계자는 “후계농육성자금의 경우 금리나 상환 조건이 굉장히 파격적이기 때문에 자금 소진 속도가 다른 자금에 비해 훨씬 빨라졌다”면서 “그렇다보니 일각에선 명확한 계획 없이 무분별하게 자금 대출을 받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검토를 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내년 예산안 축소 문제와 관련해선 “재정 당국과 협의과정에서 조정이 됐다”고 답변했고, 일각에서 흘러나오는 금리 인상설에 대해선 “초기 검토한 바는 있지만, 지금으로선 금리 인상은 검토 옵션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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