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 농어민단체인 한농연과 한수연은 24일 국회 본청 계단에서 ‘국민 먹거리 주권·농어민 생존권 사수 CPTPP 가입 저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CPTPP 가입 검토에 대한 농어업계의 우려를 전달했다. 김흥진 기자
“언제까지 농어민의 일방적인 희생만을 강요할 것인가. 농어업 생산기반 붕괴와 식량안보 위협, 농어민과 충분한 협의 없는 일방적인 CPTPP 가입 추진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후계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와 한국수산업경영인중앙연합회는 24일 국회 본청 계단에서 ‘국민 먹거리 주권·농어민 생존권 사수 CPTPP 가입 저지 긴급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이날 양 단체의 20만 회원을 대표해 전국에서 모인 농어민 지도자 300여명은 폭염경보 속 34도를 웃도는 불볕더위에도 자리를 지키며 정부의 CPTPP 가입 검토 중단을 촉구했다.
농어민들이 폭염과 폭우가 번갈아 농촌을 덮치고 농번기까지 겹친 상황에서도 여의도 국회로 향한 것은 정부가 최근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검토를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산업통상부는 지난 4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CPTPP 가입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농어업계에서는 가뜩이나 고유가·고물가와 기후변화 등으로 농어업 여건이 악화한 상황에서 추가적인 시장 개방까지 이뤄질 경우 농어업 생산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반대 이유 하나 “후발주자 추가 개방 불가피”···민감품목 보호장치 무력화 우려
한농연과 한수연은 한국이 후발주자로 CPTPP에 가입할 경우 기존 12개 회원국이 가입 조건으로 농수산물 시장 추가 개방을 비롯해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한국은 멕시코를 제외한 CPTPP 11개 회원국과 이미 개별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다자간 무역협정을 통해 상당 수준 시장을 개방했다. 농어업계는 CPTPP 가입 협상 과정에서 기존 협정의 조정뿐 아니라 추가적인 시장 개방 요구가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아직 FTA를 체결하지 않은 멕시코와는 CPTPP 가입을 계기로 새롭게 시장이 개방되는 점도 부담으로 꼽았다.
그동안 개별 FTA 협상에서 어렵게 지켜낸 농수산물 민감품목의 보호장치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농어업계는 통상협정이 체결될 때마다 주요 농수산물을 양허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관세 철폐 예외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 왔지만, CPTPP 가입 과정에서 추가 개방 요구가 제기될 경우 그동안 확보한 보호장치가 약화되거나 무력화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최흥식 한농연중앙연합회장은 “현재 12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CPTPP에 가입할 경우 기존 회원국은 우리나라에 농수산물 추가 개방을 비롯해 상당한 수준의 양보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아직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멕시코와는 CPTPP 가입을 계기로 새롭게 시장이 개방되는 만큼 농어업 분야의 피해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대 이유 둘 “농어민만의 문제 아니다”···식량안보·먹거리 안전 우려
농어민들은 CPTPP 가입에 따른 피해가 농어업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상기후와 국제정세 불안으로 식량안보의 중요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국내 농어업 생산기반이 약화되면 장기적으로 국민의 안정적인 먹거리 공급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CPTPP 가입은 비단 우리 농어민만의 문제가 아니다”며 “농수산물 시장 추가 개방에 따른 국내 농어업 생산기반 붕괴는 장기적으로 국민 먹거리 주권의 약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먹거리야말로 국민 삶의 기본이자 국가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민생의 가치”라며 정부가 CPTPP 가입에 따른 영향을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농어업 생산기반과 국민 먹거리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수산업계에서는 일본산 수산물 문제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국민적 우려와 수산물 안전성에 대한 불안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CPTPP 가입을 추진할 경우 국민 먹거리 안전 문제가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태용 한수연중앙연합회장은 “CPTPP 가입 조건으로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재개 요구가 거세질 경우 국민 건강권이 위협받고, 소비심리 위축으로 국내 수산업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며 “바다가 죽으면 국가 식량안보도 죽는다. 정부와 국회는 CPTPP 가입 추진을 즉각 중단하고 농어민의 생존권과 국가 식량안보를 보장할 근본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대 이유 셋 “농어업계와 충분한 협의부터”···통상정책 불신
정부의 통상정책 추진 과정에 대한 농어업계의 불신도 표출됐다. 한농연과 한수연은 농어업 생산기반과 국민 먹거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CPTPP 가입을 농어민과 충분한 협의 없이 추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특히 농어업계는 그동안 FTA 등 시장 개방 때마다 피해대책이 제시됐지만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지원은 충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에 CPTPP 가입 논의에 앞서 농어민과 충분히 협의하고 실효성 있는 피해대책부터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날 수산업계에서는 한·중 FTA 체결 당시 조성을 약속한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실적을 사례로 들며 기존 피해대책부터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한농연과 한수연은 공동 기자회견문을 통해 “농어업 생산기반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되는 CPTPP 가입을 농어민과 충분한 협의 없이 추진한다면 이는 그동안 정부가 스스로 내세워 온 정책 기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라며 “농어업의 지속가능성과 농어민의 생존권, 국민 먹거리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CPTPP 가입 검토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농어민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일방적인 정책 추진에 단호히 맞서며 국민 먹거리 주권과 농어민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은 이날 정부와 국회에 △CPTPP 가입 검토 즉각 중단 △농어업 생산기반 투자 확대 △통상조약 체결 시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보고 의무화 △농어촌상생협력기금 운용·활용에 대한 농림축산식품부·해양수산부 권한 강화 등을 요구했다.
# 국회서도 “농어업 희생 전제한 가입 안 돼”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여야 의원들도 농어업인의 희생을 전제로 한 CPTPP 가입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정부의 신중한 접근을 촉구했다.
더불어민주당 전국농어민위원장인 문금주 의원(전남 고흥·보성·장흥·강진)은 CPTPP 가입이 사실상 농수산물 시장의 전면적인 개방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문 의원은 “CPTPP 회원국의 농산물 평균 관세 철폐율은 96.3%로, 우리나라가 기존에 체결한 FTA의 농업부문 평균 관세 철폐율 72%를 크게 웃도는 사실상 전면 개방 수준”이라며 “호주와 뉴질랜드, 캐나다, 칠레, 멕시코 등 세계적인 농축산물 수출 강국들도 대거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문 의원은 정부가 2022년 실시한 경제적 타당성 검토 결과도 제시했다. 그는 “CPTPP 가입 시 15년간 연평균 농업 생산은 853억~4400억원, 수산업 생산은 69억~724억원 감소할 것으로 추산됐다”며 “생산비 상승과 소득 정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또다시 농수산업을 시장 개방의 희생양으로 삼으면 생산기반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수출기업의 시장 확대를 위해 농어업인들에게 시장 개방의 부담을 떠넘겨서는 안 된다. 농수산업을 희생해서 얻는 국익은 진정한 국익이 아니다”며 “농수산업 보호대책을 마련하고 농어업인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한 뒤 가입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만희 국민의힘(경북 영천·청도) 의원도 기자회견 현장을 찾아 CPTPP 가입에 앞서 농어업 피해에 대한 충분한 대책과 보장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국회 본관 6층 위원장실에 있다가 본청 계단에서 들려오는 농어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자회견장을 찾았다”며 “의정활동 11년 가운데 8년 이상을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에서 일한 만큼 농어업 현장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CPTPP 가입으로 엄청난 농어민의 희생이 불 보듯 명확하다면 이에 대한 대비책을 철저히 수립하고 확실한 보장이 전제된 이후에 가입 자체를 논의하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다.
현재 보건복지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보건복지위원회에서도 국민 먹거리를 책임지는 식품의약품안전처와 함께하고 있다”며 “지금은 다른 상임위에 있지만 늘 지역 농어민의 건강과 안녕을 살필 수 있는 의정 활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김경욱·홍란 기자 kimkw@agri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