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농정신문 권순창 기자] 연천 민통선 무단경작에 ‘50년 묵인’ 깨고 정리작업 영세농 10여 가구 경작하던 농지, 대농 일가에 낙찰 영세농들 준비 없이 생계 막히고…지역공동체도 붕괴경기 연천군 왕징면 강내리 민통선 안에 있는 논. 무단경작이지만 50년 동안 사실상 정부로부터 경작권을 인정받아 온 농지다. 경기 연천 강내리 민통선 내 농지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 10여명이 갑자기 농지를 잃는 사태가 발생했다. 국유지 무단경작 정리 과정에서 한국자산관리공사(사장 정정훈, 캠코)의 기계적 업무 수행이 초래한 일이다.
문제의 농지는 1970년대 외지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이 생계를 위해 개간한 농지다. 국방부 소유지를 무단 개간·경작한 것이지만 당시 정부가 접경지역 이주를 유인했던 만큼 행정의 묵인이 이뤄졌다. 이후 이 농지는 농민들의 자발적 개간·개량이 이뤄지고 서로 비슷한 처지의 영세농들(1인당 수천평 규모)에게 경작권이 이양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수십년의 세월 동안 농민들에게 무단점유에 대한 변상금이 부과된 건 2007년 한 차례뿐인데, 이조차도 징벌이 아니라 댐 건설로 인한 수몰 피해에 보상 근거를 마련해 주기 위한 절차였다. 국방부가 묵인을 넘어 농민들의 경작권을 최대한 존중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상황이 변한 건 2021~2023년 사이 이 땅들의 소유권이 재정경제부로 넘어가면서(용도폐지)부터다. 재경부를 대리해 이 땅을 관리하게 된 캠코는 농민들의 무단경작을 양성화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무단행위를 양성화하는 일이야 마땅히 필요한 일이지만, 문제는 50년의 신뢰관계와 영세농들의 생계가 걸린 일임에도 이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2~3년 전부터 자신의 논에 ‘허가 없이 사용해선 안 된다’는 캠코의 팻말이 꽂히기 시작했지만 농민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 몇몇 농민이 팻말에 적힌 전화번호로 문의를 해도 “별도의 공지가 있을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을 뿐, 자세한 상황 설명을 들을 순 없었다.
해마다 하나씩, 세 개의 팻말이 꽂힌 한 영세농민의 농지. 농민이 팻말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해 상황을 문의해 봤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할 만한 설명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올해 초, 한 농민이 좀더 확실하게 상황을 파악해 보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농지 소유주가 국방부에서 기경부로 변경됐고 △임차권 공개입찰이 이뤄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됐다. 그리고 이 때부터 농민들에게 구체적인 통보가 도달하기 시작했다.
통보의 내용은, 소정의 변상금(6년치에 해당하는 임차료)을 납부하면 수의계약으로 임차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되 그렇지 않으면 임차권을 곧바로 3월 공개입찰에 부친다는 것이었다.
정식 임대차 계약을 맺으면 3300평 기준 연 210만원 정도의 임차료를 내야 하지만, 그동안 받을 수 없었던 공익직불금을 수령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이는 크게 부담되는 게 아니었다. 문제는 변상금이었다. 농가마다 수백만원에서 천만원대에 달하는 이 변상금을 영세 농가들이 한두 달만에 마련할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결국 임차권은 부득불 공개입찰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상황이 절망적이진 않았다. 수십년간 땅을 나눠 농사지어 온 주민들 간의 신의관계가 있었을 뿐더러, 영세농이 굳이 최저입찰가(3300평 기준 연 210만원)보다 높게 응찰했다간 오히려 손해를 볼 수 있는 터였다. 최저입찰가보다 약간 높은 선에서만 응찰하면 무난히 땅을 보전할 수 있으리라는 게 영세 농민들의 상식이자 지역 내의 암묵적 약속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농민들도, 캠코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발생한다. 지역의 한 대농 일가가 공개입찰된 모든 땅에 최저입찰가의 1.5배에 해당하는 높은 가격으로 응찰한 것이다. 결국 십수명이 나눠 농사짓던 땅은 모두 이 대농 일가에게 편입되고, 영세농들은 한순간에 생계 기반을 잃어버리게 됐다.
시기는 3월. 이미 영농계획 수립이 끝나고 종자 준비까지 마친 시점이었다. 올해는 물론, 설령 내년 이후라 해도 새로 농지를 구하기는 어려운 상황. 구매해 둔 볍씨는 고스란히 폐기하고, 모두 일용직 등 농외소득을 구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농민들은 한목소리로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30년 넘게 내외가 청춘을 다 바쳐서 돌 골라내고 길을 만든 땅인데 너무 억울하다”, “부친이 20년, 내가 20년 시설을 닦아 이제야 제대로 농사짓게끔 만들어 놨는데 통째로 빼앗겨 버렸다”, “황무지를 논밭으로 만들어 놓은 개간비라도 보상해 주든가, 아니면 경작권을 우선적으로 보장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호소가 빗발치고 있다.
최소한 팻말이 꽂히기 시작한 2~3년 전에라도 농민들에게 자세한 상황 설명이 이뤄졌다면 변상금을 마련하든, 다른 농지를 물색하든 생계를 모색할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캠코의 현장 감수성 부족이 매우 뼈아픈 상황이며, 이로 인해 한순간에 영세농들의 생계가 끊기고 지역 공동체마저 흔들리는 결과가 빚어졌다.
김상기 접경지역농민연합 사무국장(한국친환경농업협회 회장)은 “무단경작이라지만 몇십년 동안 농민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국가가 믿음을 준 땅이다. 이런 땅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걸 분명하게 당사자들에게 전달하고 협의해야 하는데 그냥 기계적으로 행정 절차만 밟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캠코 측은 농사를 시작하기 전에 농민들에게 통보를 하고 공개입찰을 진행한 만큼 절차상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다만 공개입찰에서 대농 일가가 농지를 낙찰받은 일에 대해선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인데 안타깝고, 그분들(영세농)껜 정말 드릴 말씀이 없다”고 답변했다.
설상가상, 당초 영세농들에게 수의계약의 조건으로 내세웠던 ‘변상금’에 대해선 캠코 내부에서도 명확하게 부과 기준이 정리돼 있지 않은 모습이다. 변상금은 과거 무단점유에 대한 징벌인 만큼 수의계약이 무산됐더라도 부과해야 할지를 ‘논의 중’이라는 설명인데, 자칫 영세농들이 농지를 잃고 수백~수천만원의 변상금까지 물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영세농들이 수십년 세월 동안 개간해 놓은 산비탈의 밭. 마찬가지로 지난 3월 공개입찰에서 대농가가 낙찰받은 땅이다.
출처 : 한국농정신문(http://www.ikpnews.net)
|